8화 — 원금보다 무거운 것
그 소식은 이듬해 봄, 배달 기사단을 통해 들어왔다.
"아가씨, 작년 가을에 오셨던 그 할아버지 기억하십니까? 갈대 마을의 오토 영감님이요."
카이엘이 보고서를 내밀며 말했다. 열여섯이 된 그는 어느새 엘리시아보다 머리 하나가 컸고, 견습 딱지를 떼고 정식 종자가 되어 있었다. 배달 기사단장 일도 여전히 맡고 있었다.
"기억하지. 잘 지내셔?"
카이엘은 대답 대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서부 순회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대. 빚을 안 갚았다고."
엘리시아의 손에서 깃펜이 멈췄다.
"얼마나?"
"원래 빌린 건 은화 서른 닢. 지금 갚으라는 건 금화 열두 닢."
은화 서른 닢이면 금화 한 닢 반. 그것이 반년 만에 여덟 배로 불어나 있었다. 엘리시아는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숫자만 들어도 이율이 보였다.
"못 갚으면?"
"집이랑 밭을 압류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채권자 밑에서 노역 10년."
"일흔 넘은 노인한테 노역 10년이면……"
엘리시아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카이엘도 묻지 않았다. 두 사람 다 그 뒤의 말을 알고 있었다.
"채권자는 누구야."
카이엘이 보고서 맨 아래를 가리켰다. 서부 지역 사채업자의 이름 옆에, 엘리시아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문장(紋章)이 찍혀 있었다. 금화 한 닢을 움켜쥔 독수리의 발톱.
금화 상회.
엘리시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말 준비해 줘. 지금 갈 거야."
서부 순회 재판소는 갈대 마을에서 반나절 거리의 작은 읍내에 있었다. 재판은 사흘 뒤였다. 오토는 그동안 재판소 지하의 채무자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축축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엘리시아가 카이엘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자, 쇠창살 너머 짚더미 위에 웅크리고 있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반년 사이에 그는 열 살은 더 늙어 보였다.
"아, 아가씨……?"
오토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엘리시아는 쇠창살 앞에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드레스 자락이 젖은 바닥에 끌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기억하다마다요. 우리 마리, 장례까지 치러 주신 분을 어떻게……" 오토는 고개를 숙였다. "이런 꼴을 보여 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세요. 처음부터요."
오토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짚더미 위에 다시 주저앉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는…… 가난했습니다. 평생을요. 늪지 옆에 손바닥만 한 밭 하나, 그게 전부였지요. 마리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 의원 부를 돈도 없었습니다."
마리가 처음으로 '먹고 싶은 것'을 말한 날, 오토는 마을을 다 뒤졌다고 했다. 하지만 로젠베르크까지 갈 마차를 빌릴 돈도, 가는 동안 먹을 양식을 살 돈도, 치킨값을 낼 돈도 없었다.
"그때 읍내에 사람이 하나 왔습니다. 돈을 빌려준다고. 담보도 필요 없고, 서명만 하면 된다고. 저는 글을 모릅니다. 그 사람이 종이에 뭐라고 적었는지도 몰랐지요. 그냥 손도장을 찍었습니다."
은화 서른 닢. 그 돈으로 낡은 수레와 말을 빌리고, 닷새 치 빵을 사고, 치킨값을 챙겼다. 남은 몇 닢으로는 마리에게 털 담요를 하나 사 주었다.
"돌아와서 마리를 묻고 나니, 그 사람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갚으라고요. 한 달에 이자가 반이 붙는다고 하더군요. 반이요.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뭘 찍었는지."
월 5할. 복리. 엘리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가 서명했던 차용증보다도 더 지독한 숫자였다. 글을 모르는 노인에게, 죽어 가는 아내를 위한 돈을 빌려주면서.
"밭을 팔아도 은화 스무 닢이 안 됩니다. 어차피 저 혼자 남은 목숨이니, 노역이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마리 곁에 가는 게 조금 일러질 뿐이지요."
오토가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아가씨,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이 안에 갇혀서 반년 동안 계속 생각한 게 있습니다."
"……뭔데요?"
"빚진 거, 후회 안 합니다. 거기까지 간 것도 후회 안 합니다. 마리가 마지막에 그렇게 웃었으니까요. 평생 그렇게 웃는 얼굴을 몇 번 못 봤습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근데 하나가 후회됩니다. 그 노란 거. 레몬주스요."
엘리시아는 숨을 멈췄다.
"마리가 그걸 그렇게 맛있게 먹을 줄 알았으면…… 치킨 먹으러 그 먼 길 떠나기 전에, 더 일찍 사다 줄 수 있었을 텐데요. 읍내 장날에도 남쪽 상인이 가끔 레몬을 팔았거든요. 비싸다고, 그런 건 우리 같은 사람이 먹는 게 아니라고, 한 번도 사 볼 생각을 안 했습니다."
오토는 거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 알만 사다 줬어도. 꿀물에 타서 한 잔만 줬어도. 그 사람이 그렇게 웃는 걸 한 번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닷새를 덜컹거리는 수레에서 고생하지 않고, 집에서, 따뜻한 데서……"
노인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어깨가 들썩였다. 유치장의 어둠 속에서, 소리 죽인 울음만이 흘러나왔다.
엘리시아는 쇠창살 사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노인의 떨리는 손을 꼭 잡았다. 차갑고 거친 손이었다. 아빠의 손이 이랬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 후회를. '그때 해 줄걸.' 엄마가 병원 침대에서 "윤희야, 엄마 짜장면 먹고 싶다"고 했을 때, 병원 밥 먹어야 한다고 말렸던 열네 살의 자신을. 그다음 주에 엄마는 더 이상 아무것도 삼킬 수 없게 되었다.
"할아버지." 엘리시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또렷했다. "마리 할머니는요, 그 레몬주스를 마시면서 '봄 같다'고 하셨어요. 제가 옆에서 들었어요."
오토가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그 먼 길을 데려가 주셨으니까, 할머니는 봄을 맛보고 가신 거예요. 그건 후회할 일이 아니에요."
노인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이번에는 소리 내어 울었다.
카이엘은 계단 위에서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의 주먹이 하얗게 쥐어져 있었다.
사흘 뒤, 서부 순회 재판소.
재판정은 텅 비어 있었다. 가난한 노인의 빚 재판을 구경하러 올 사람은 없었다. 판사석에는 지루한 얼굴의 순회 판사가, 원고석에는 기름진 얼굴의 사채업자가 앉아 있었다. 피고석의 오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피고 오토, 금화 열두 닢의 채무를 인정하는가?"
오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재판정 문이 열렸다.
"피고 측 대리인입니다."
모든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장미 문장이 수놓인 망토를 걸친 열다섯 살 소녀가 서 있었다. 그 뒤로 검을 찬 종자 한 명, 그리고 두꺼운 법전을 품에 안은 안경 쓴 소녀 한 명.
"로, 로젠하르트 공작가……?" 판사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엘리시아 로젠하르트입니다. 오토 씨의 대리인 자격으로 왔어요." 엘리시아는 피고석 옆에 섰다. "재판장님, 이 차용 증서는 무효입니다."
사채업자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립니까! 여기 손도장이 똑똑히……"
"클라리스 언니."
클라리스가 법전을 펼쳐 판사석에 올려놓았다. 손가락으로 한 조항을 짚었다.
"『발레리아 왕국 고법전』, 제7권 채무 편, 제41조." 클라리스가 또박또박 읽었다. "'어떠한 대여에서도, 이자는 원금의 곱절을 넘을 수 없다. 이를 넘은 부분은 신과 왕의 이름으로 무효로 한다.' 2백 년 전 성왕 레오폴트 1세가 제정한 이후, 한 번도 폐지된 적 없는 조항입니다."
"그런 낡은 법을……!"
"낡았어도 법이에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내용을 읽어 주지 않고 받은 손도장은, 같은 법전 제38조에 따라 증서로서 효력이 없어요. 오토 씨는 이자가 얼마인지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어요. 증서를 작성한 당신이 그 자리에서 이율을 읽어 줬다는 증인, 있어요?"
사채업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판사는 법전과 증서를 번갈아 보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공작가의 딸이 직접 나선 재판에서, 왕국 법전을 무시할 배짱은 없었다.
"……본 법정은 제38조에 따라 해당 차용 증서의 이자 약정을 무효로 하고, 피고는 원금 은화 서른 닢만을 변제할 의무가 있음을 선고한다."
땅, 땅, 땅.
엘리시아는 허리춤의 주머니를 풀어, 은화 서른 닢을 원고석 탁자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짤랑, 짤랑. 마지막 한 닢까지.
"원금이에요. 영수증 써 주세요."
사채업자는 이를 갈며 영수증에 서명했다. 그리고 재판정을 나서며, 엘리시아의 옆을 지나칠 때 낮게 중얼거렸다.
"공작가 아가씨. 그레고르 남작님께서 이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래요?" 엘리시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럼 전해 주세요. 저도 기억하겠다고."
재판소 앞 계단에서, 오토는 엘리시아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엘리시아가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할아버지, 그 은화 서른 닢은 공짜가 아니에요."
"예, 예. 평생을 걸려서라도 갚겠습니다."
"이자는 없어요. 대신 일해서 갚으세요." 엘리시아가 웃었다. "로젠 치킨에 새 일자리가 하나 생겼거든요. '마리의 레몬주스' 담당. 매일 아침 레몬을 짜고, 꿀을 넣고, 손님들한테 내 주는 일이에요. 숙소랑 밥은 가게에서 줄게요."
오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주름진 눈가에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돌아오는 길, 말 위에서 카이엘이 물었다.
"아까 그 법 조항. 언제 찾았어?"
"사흘 동안. 클라리스 언니가 밤새웠어."
"그 사채업자, 금화 상회 사람이잖아. 앞으로 귀찮아질 거야."
"알아." 엘리시아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근데 카이엘, 오늘 알았어. 오토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영지에 몇 명이나 될까.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빌릴 곳이 그런 데밖에 없는 사람들."
"……많겠지."
"응. 많을 거야."
엘리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생에서 그녀는 은행 창구에 앉아 있었다. 신용 등급이 낮다고, 담보가 없다고, 대출을 거절당하고 돌아서던 사람들의 뒷모습을 수없이 보았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때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엔 생각해야 해.'
가난한 사람도 정당한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는 곳. 적은 돈이라도 안전하게 맡기고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곳. 이 세계에는 아직 그런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만들면 된다.
그날 밤 엘리시아의 수첩 새 장 맨 위에는, 아직은 낯선 단어 하나가 적혔다.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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