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이번 생의 내 집
로젠하르트 공작 레오나르트는 검을 뽑았다.
로젠베르크 저택 서재. 무릎을 꿇은 카이엘 앞에서, 북부의 철벽이 300년 된 가문의 대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칼날이 촛불을 받아 번쩍였다.
"다시 말해 보게."
"엘리시아 아가씨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카이엘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북부의 영지를 다시 일으키고, 평생 아가씨 곁을 지키겠습니다."
"내 딸을, 그 무너진 북부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예."
대검이 머리 위로 높이 올라갔다. 문밖에서 귀를 대고 있던 세 자매가 동시에 숨을 삼켰다. 엘리시아는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대검이 내려왔다.
카이엘의 어깨 위에, 칼등으로. 아주 가볍게. 기사 서임식 때처럼.
"……내 딸을 울리면." 공작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검이 칼등이 아니라 칼날로 내려갈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비 오는 날은 절대 바깥에 내보내지 말게. 그 아이가 비 오는 날을 무서워하는 거, 나도 아네."
"……알고 있습니다."
공작은 대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털썩 의자에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깨가 들썩였다.
"우리 엘리가…… 우리 아기가…… 시집을 간다니……"
문이 벌컥 열리고 세 자매와 엘리시아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뒤로 공작부인이 손수건을 들고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남편 몫으로.
"레오. 우세요?"
"안 운다!"
"우시잖아요."
"이건…… 땀이다!"
루루가 "내가 카이엘 오빠라고 했지!"를 외치며 뛰어올랐다. 이사벨라는 카이엘의 등을 세게 두드리며 "다음 대련은 처남 자격으로 봐주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클라리스는 조용히 수첩을 꺼내, 왕태자파의 패배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논리가 지는 것도 나쁘지 않음.'
그날 밤, 엘리시아는 가족을 식당에 모았다.
식탁 위에는 로젠 치킨 한 바구니와 레몬주스 여섯 잔이 놓여 있었다. 5년 전, 처음 치킨을 튀겼던 날처럼.
"말씀드릴 게 있어요."
가족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양피지는 없었다. 이번에는 계획서가 아니었다.
엘리시아는 레몬주스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차가운 유리가 손바닥에 닿았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입을 열었다.
"저…… 다른 사람의 기억이 있어요."
식당이 조용해졌다.
"아주 먼 곳이에요. 여기랑은 전혀 다른 세상. 거기서 저는 서윤희라는 사람이었어요. 스물여섯 살이었고, 은행이라는 곳에서 일했어요. 예금소 같은 곳이요."
그녀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치킨집을 하던 부모님. 비 오는 금요일 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아빠. 가게 바닥에 쓰러진 엄마. 병원비로 사라진 모든 것. 이모 집 거실 한쪽의 커튼. 혼자 살던 원룸. 8년 동안 부은 적금. 그리고 처음으로 이름이 적힌 문을 가질 뻔했던 날, 초록불 횡단보도.
"그날 저는 죽었어요.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여기였어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루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고, 이사벨라는 입을 막고 있었다. 클라리스는 수첩을 펼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근데요."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게 이상해요. 엘리시아의 기억도 다 있어요. 루루가 천둥 치는 밤마다 제 침대로 기어들던 거, 이사벨라 언니가 몰래 검술 연습하던 거, 클라리스 언니가 귀에 밀랍 붙이고 다니던 거."
"엘리." 클라리스가 작게 항의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런데 그 기억들이, 다 제 거예요. 남의 일기장을 훔쳐 읽는 것 같으면서도, 분명히 제가 겪은 일이에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서윤희가 엘리시아한테 들어온 건지, 아니면 엘리시아가 말에서 떨어지면서 서윤희라는 전생을 기억해 낸 건지." 엘리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레몬주스 잔 위로 떨어졌다. "제가 진짜 이 집 딸이 맞는지, 5년 동안 계속 무서웠어요."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공작이 일어나 있었다. 그는 식탁을 돌아 엘리시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 커다란 팔로 딸을 끌어안았다.
"……아빠가." 공작의 목소리가 엘리시아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이번에는 땀이라고 우기지 않았다. "아빠가 그 아빠 대신 사과하마. 금방 갔다 온다고 해 놓고, 돌아가지 못해서."
엘리시아는 그 품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었다. 열 살 때 울지 못했던 울음이었다.
공작부인이 다가왔다. 그리고 남편의 팔 사이로, 딸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5년 전 그날, 침대맡에서 그랬던 것처럼. 차갑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알고 있었단다."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깨어나서 처음 나를 봤을 때, 그 눈을 보고 알았어. 열세 살 아이의 눈이 아니었으니까. 아주 오래 혼자 버텨 온 사람의 눈이었지." 공작부인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엘리시아, 네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단다. 서윤희가 엘리시아가 된 거든, 엘리시아가 서윤희를 기억해 낸 거든."
그녀는 딸의 두 뺨을 감쌌다.
"사흘 동안 눈을 감고 있던 내 딸이, 눈을 떴어. 그리고 5년 동안 이 집을 지켰지. 그래도 넌 우리 딸이야."
엘리시아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마지막으로 맞물리는 것을 느꼈다. 은행 전산 시스템의 야간 배치처럼, 흩어져 있던 두 개의 기억이 하나의 장부로 정렬되었다.
치킨집 딸이었던 아이. 공작가 셋째였던 아이. 횡단보도 위에서 식탁 사진을 보던 은행원. 흑마 위에서 고집을 부리던 소녀.
둘 중 누가 진짜인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둘 다, 나였어.'
"엘리 언니." 루루가 레몬주스 잔을 들어 올렸다. 열세 살 소녀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지만,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럼 언니는 엄마 아빠가 네 명이고, 언니는 세 명이고, 동생은 나 하나네!"
"……그렇게 되나."
"그럼 내가 제일 귀한 거네!"
식당에 웃음이 터졌다. 울면서 웃는, 이상한 웃음이었다. 이사벨라와 클라리스가 양쪽에서 엘리시아를 끌어안았고, 루루가 그 위로 뛰어들었다. 공작은 그 모두를 한꺼번에 안으려다 의자를 넘어뜨렸고, 공작부인은 "레오"라고 말하며 손수건을 하나 더 꺼냈다. 이번에는 자기 몫이었다.
이듬해 봄.
갈대 마을 언덕 위, 작은 묘비 하나가 서 있었다. 하얀 돌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마리 — 봄을 맛보고 간 사람.'
그 옆에 어린 레몬 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었다. 오토의 예금 이자로 산 것이었다. 북부의 추위에도 버틸 수 있도록, 엘리시아가 남부 상인을 통해 특별히 구해 온 품종이었다.
오토가 나무 밑동에 물을 주었다. 엘리시아와 카이엘이 그 옆에 서 있었다.
"열매가 열리면, 첫 레몬은 마리한테 줄 겁니다." 오토가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가씨한테."
"저 말고 할아버지가 드세요."
"아닙니다. 아가씨 덕분에, 저도 이제 후회가 하나 줄었거든요." 노인이 주름진 얼굴로 웃었다. "레몬 한 알 사다 줄 걸, 하는 후회요. 이제 매일 사다 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해 여름, 엘리시아는 북부로 떠났다.
카이엘의 영지는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다. 성채의 지붕은 절반이 무너져 있었고, 밭은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돌아온 영지민은 서른 가구가 채 안 되었다.
엘리시아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자, 그럼 계산을 시작해 볼까.'
무너진 성채 1층에, 로젠하르트 예금소 북부 1호점의 간판이 걸렸다. 그 옆에는 로젠 치킨 북부점이. 그리고 그 사이, 문턱 없는 입구 옆 나무 판에는 오토 할아버지의 글씨 같은 삐뚤삐뚤한 글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리의 레몬주스 — 70세 이상 무료.'
카이엘은 첫 번째 대출 고객이 되었다. 엘리시아는 정말로 대출 심사를 엄격하게 했다. 서류를 열 번 읽어 주고, 상환 계획서를 세 번 고쳐 쓰게 했다. 카이엘은 투덜거리면서도 끝까지 따랐다. 그리고 계약서 맨 아래, 서명란에 이름을 쓰기 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읽고 서명하는 거, 장인어른한테 배웠어."
"……그거 우리 아버지가 제일 못 하는 건데."
"요즘은 잘하신대. 어머님이 그러시던데."
어느 저녁, 엘리시아는 반쯤 고친 성채 꼭대기에 올라섰다.
북부의 노을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 아래에서 영지민들이 밭을 갈고, 무너진 집을 고치고,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로젠 치킨에서 튀김 냄새가 올라왔다. 예금소 창구 앞에는 작은 줄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남색 망토의 기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서. 언제나처럼.
엘리시아는 문득, 전생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횡단보도 앞에서 들여다보던 휴대폰 화면. 원목 4인용 식탁. 그리고 끝내 받지 못한 아파트 열쇠.
그때 그녀는 생각했다. 내 이름이 적힌 문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누구의 거실 한쪽도, 누구의 커튼 뒤도 아닌, 내 집.
지금 그녀에게는 문이 많았다. 로젠베르크의 금박 천장 아래 방. 왕도 은방울 골목의 예금소 사무실. 북부의 반쯤 무너진 성채. 어디에도 그녀의 이름이 적힌 문패는 없었다.
하지만 어느 문을 열어도,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시끄럽고, 툭하면 울고, 돈 관리는 엉망이고, 서로의 비밀을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 주는 사람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지난 생에서는, 열쇠를 받기도 전에 죽었지.'
카이엘이 계단을 올라와 그녀 옆에 섰다. 아무 말 없이, 자기 망토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비도 오지 않는데.
엘리시아는 웃으며 그 망토를 여몄다.
'근데 이번 생엔, 처음부터 집이 있었어.'
노을이 저물었다. 저 멀리 남쪽 하늘 아래, 금박 천장이 있는 저택에서 한 천사가 웃고 있을 것이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다정하게.
『공작가 셋째 딸은 적금을 붓는다』 —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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