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열린 금고
"보물고를 통째로?"
아침 여섯 시, 왕도 저택 서재. 잠옷 차림의 공작이 딸의 말을 되물었다.
"네. 공작가 보물고에 있는 모든 것을, 예금소 예금의 담보로 걸고 싶어요. 예금자들이 돈을 다 찾아가도 모자라지 않게요. 그리고 그걸 사람들 눈앞에 보여 줄 거예요."
엘리시아는 밤새 쓴 문서를 내밀었다. 『로젠하르트 공작가 보물고 담보 제공 약정서』. 공작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첫 줄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 시간이 없어요. 정오까지……"
"읽고 서명하라고 했잖니, 우리 엘리가."
공작은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보물고의 금괴, 대대로 내려온 검, 선대 공작부인들의 보석, 그리고 공작가의 상징인 장미 왕관까지. 목록은 세 장에 걸쳐 있었다. 마지막 장에 이르자 공작은 잠시 펜을 멈췄다.
"장미 왕관까지 거는 거냐."
"……네. 그게 제일 커요."
공작은 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북부의 철벽이 아니라, 그냥 딸바보 아버지의 얼굴로.
"그 왕관은 300년 동안 보물고에서 먼지만 쌓였단다. 드디어 쓸모가 생겼구나."
펜이 움직였다. 큼직한 서명.
그 뒤에서 공작부인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서 무언가를 풀었다. 엘리시아가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걸었던, 그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이것도 넣으렴. 내 친정에서 가져온 거라 목록에 없을 거다."
"어머니, 그건……"
"엘리시아." 공작부인이 딸의 손에 목걸이를 쥐여 주었다. "집이라는 건, 이런 때 쓰라고 있는 거란다."
정오. 은방울 골목.
예금소 앞 광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줄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예금소 문 앞에 몰려들어 웅성거렸고, 그 사이사이에서 금화 상회의 사람들이 불을 지폈다.
"금고 바닥났대!"
"오늘 오후면 문 닫는대!"
그때, 광장 끝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수레 여섯 대가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각 수레마다 공작가 기사 넷이 호위했다. 그리고 수레 위에는 무거운 나무 상자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맨 앞 수레의 마부석에는 공작 레오나르트가, 갑옷 대신 평상복 차림으로 직접 고삐를 쥐고 있었다.
수레들이 예금소 앞에 멈췄다. 군중이 숨을 죽였다.
예금소 문이 활짝 열렸다. 엘리시아가 걸어 나왔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등은 꼿꼿했다. 그녀는 맨 앞 수레 위로 올라섰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로젠하르트 예금소의 엘리시아입니다."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어젯밤부터 소문이 돌았죠. 예금소 금고가 비었다고. 공작가가 여러분의 돈으로 빚을 갚았다고. 오늘 오후면 문을 닫는다고.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제가 말로 하면 믿으시겠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안 믿으시겠죠. 저라도 안 믿어요. 그래서 보여 드리려고요."
엘리시아가 손짓했다. 기사들이 첫 번째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정오의 햇빛 아래, 금괴가 번쩍였다.
두 번째 상자. 은괴. 세 번째, 보석. 네 번째, 대대로 내려온 검과 갑옷. 상자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군중 사이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리고 마지막 수레, 마지막 상자에서 공작이 직접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붉은 루비 장미가 박힌 황금 왕관. 로젠하르트 공작가 300년의 상징.
광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게 로젠하르트 공작가 보물고 전부예요." 엘리시아가 말했다. "오늘 아침, 아버지께서 이걸 전부 예금소 예금의 담보로 거셨어요. 만약 예금소가 여러분께 돈을 돌려드리지 못하면, 이걸 팔아서라도 한 닢도 빠짐없이 돌려드릴 거예요. 이 약정서에 아버지 서명이 있어요. 그리고……"
엘리시아는 목에 건 사파이어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이건 어머니 거예요. 목록에도 없는데, 넣으라고 하셨어요."
그녀는 수레에서 내려와, 예금소 금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금고의 두꺼운 철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이게 지금 예금소 금고예요. 와서 보세요. 누구든."
사람들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금고 안에는 은화와 동화가 담긴 자루들이 줄지어 있었다. 반쯤 비어 있었다. 엘리시아는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맞아요. 반쯤 비었어요. 어젯밤 여러분이 찾아가신 만큼요. 그럼 나머지 돈은 어디 갔을까요?"
그녀는 군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을 가리켰다.
"대장장이 브루노 씨. 작년 가을에 예금소에서 금화 다섯 닢 빌려 가셨죠?"
군중 속에서 덩치 큰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예, 예. 새 화덕 놓는다고……"
"화덕은 잘 돌아가요?"
"그럼요! 일감이 두 배로 늘었습니다. 다음 달이면 다 갚을 수 있……"
"농부 한스 씨. 씨앗이랑 쟁기 사신다고 은화 마흔 닢."
"올해 밀 농사 대풍입니다요!"
"시장 과일 노점 그레타 아주머니. 차양이랑 수레."
"비 와도 장사할 수 있어서 살 것 같아요!"
엘리시아는 군중 속의 얼굴들을 하나씩 불렀다. 대장장이, 농부, 노점상, 재봉사, 빵집 주인. 이름이 불릴 때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옆집 대장장이, 단골 빵집 주인, 매일 과일을 사던 노점상.
"여러분이 맡긴 돈은 사라진 게 아니에요. 여러분 이웃의 화덕이 되고, 씨앗이 되고, 수레가 됐어요. 그리고 그분들이 그 돈을 갚으면, 다시 여러분께 이자를 붙여 돌아가요. 그게 예금소예요."
엘리시아는 숨을 골랐다.
"지금 돈을 찾아가셔도 돼요. 찾아가실 분은 줄을 서 주세요. 한 닢도 빠짐없이 드릴게요. 금고가 비면 보물고에서 꺼내 드릴게요. 하지만 혹시, 저를 조금이라도 믿어 주신다면……"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 돈을, 조금만 더 맡겨 주세요."
광장에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허리 굽은 노인이었다. 레몬 냄새가 나는 앞치마를 두른.
오토는 품에서 예금 증서를 꺼냈다. 통장 번호 1번. 그리고 그 옆에, 천 주머니 하나를 함께 꺼냈다. 짤랑.
"아가씨. 저, 마리 묘비 값이 다 모였습니다. 어제 찾으러 오려고 했는데……" 오토가 천 주머니를 창구 위에 올려놓았다. "한 해만 더 맡기겠습니다. 이자 붙으면, 묘비 옆에 레몬 나무도 한 그루 심어 주려고요."
엘리시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의 정적. 그리고 군중 속에서 작은 손 하나가 올라왔다.
"저, 저도요!"
엄마 신발을 사겠다던 그 아이였다. 키가 한 뼘쯤 자라 있었다. 아이는 꼬깃꼬깃한 증서를 흔들며 소리쳤다. "저 아직 엄마 신발 다 못 모았어요! 안 찾아갈래요!"
누군가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번졌다.
"나도 안 찾아가!" 대장장이 브루노가 외쳤다. "공작님이 왕관까지 걸었는데, 내가 은화 몇 닢 갖고 호들갑 떨면 체면이 안 서지!"
"우리 딸 혼수 돈도 그냥 둘래요!"
하나둘, 사람들이 증서를 다시 품에 넣었다. 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군중 뒤편에서 누군가 외쳤다. "속지 마! 보물이 다 가짜야! 공작가는 망했어!"
그때였다.
"왕실 근위대다! 길을 비켜라!"
광장 반대편에서 은빛 갑옷의 기병대가 들어섰다. 그 선두에, 금실 수가 놓인 백색 망토를 걸친 청년이 백마를 타고 있었다.
테오도르 왕태자였다.
그는 예금소 앞까지 말을 몰고 와서 멈췄다. 그리고 시종에게서 두루마리 하나를 받아 높이 펼쳐 들었다. 왕실 인장이 찍힌 칙서였다.
"발레리아 왕국 왕태자 테오도르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그의 목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오늘부로 왕실은 로젠하르트 예금소에 맡겨진 모든 예금을 보증한다. 예금소가 돈을 돌려주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왕실 금고가 대신 갚을 것이다. 이는 왕실의 명예를 건 약속이다!"
광장이 폭발하듯 술렁였다. 환호성이 터졌다. 공작가의 보물고에 이어, 왕실까지. 그 이상의 보증은 이 왕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말에서 내려 엘리시아 앞에 섰다. 그리고 낮게 웃었다.
"그대가 그 일을 시작하는 날 꼭 보고 싶다고 했지. 끝나는 날을 보게 둘 수는 없소."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
"어젯밤 그대의 둘째 언니가 왕궁 문을 두드렸소. 새벽 두 시에. 내게 쉰한 번째 질문을 하겠다면서." 테오도르가 클라리스를 돌아보았다. 클라리스는 안경을 고쳐 쓰며 시선을 피했다. "'왕실 보증 칙서를 아침까지 쓸 수 있습니까?' 정답을 맞혀서 감점이 만회됐다더군."
그리고 해 질 녘.
예금소 앞 광장은 평온을 되찾았다. 찾아간 돈보다 다시 맡긴 돈이 더 많았다. 클라리스는 장부를 맞추다가 "말도 안 돼"를 열네 번 중얼거렸다.
엘리시아는 예금소 앞 계단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문턱 없는 입구 앞 돌바닥에. 손에는 오토가 가져다준 레몬주스 잔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광장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규칙 6번 지킨다며……"
그때, 광장 끝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말 여섯 마리. 배달 기사단의 말들이었다. 소년들은 흙투성이였고, 몇은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리고 맨 앞, 검은 말 위에.
엘리시아는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카이엘이 말에서 내렸다. 남색 기사복은 찢어져 있었고, 왼쪽 팔뚝에는 피가 배어 나온 천이 감겨 있었다. 그는 엘리시아 앞까지 걸어와서, 기름 먹인 천으로 싼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레고르 남작의 비밀 장부."
엘리시아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의 팔만 보고 있었다.
"……그 팔, 뭐야."
"남작 별장 금고 지키는 놈들이 좀 셌어.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광장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테오도르도, 언니들도, 공작도.
"규칙 6번! 모두 무사히 돌아올 것! 네가 직접 쓴 거잖아!"
"돌아왔잖아."
"피 흘리면서 돌아오는 건 무사한 게 아니야!"
카이엘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친 팔이 아닌 쪽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엄지로 쓱 닦았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 엘리시아도 몰랐다.
"……미안. 급료 삭감해."
엘리시아는 대답 대신 그의 멀쩡한 팔을 주먹으로 쳤다. 한 번, 두 번. 힘없는 주먹이었다.
테오도르가 다가와 장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몇 장을 넘기더니, 얼굴이 굳었다.
"……소문을 퍼뜨린 자들에게 준 돈. 전단 인쇄 비용. 왕실 재정 고문 셋에게 준 뇌물. 그리고 지난 10년간 위조 차용 증서로 빼앗은 귀족 영지 열일곱 곳." 왕태자가 장부를 덮었다. "이것만으로도 교수대에 세 번은 오르겠군."
그는 근위대장을 돌아보았다.
"그레고르 남작을 체포하라. 지금 당장."
그레고르 남작은 그날 밤 왕도 항구에서 붙잡혔다. 금괴를 가득 실은 배에 오르기 직전이었다고 했다. 열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는 모두 증거물로 압수되었다.
금화 상회는 문을 닫았다. 위조 차용 증서로 빼앗긴 영지들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 영지 주인 중 하나가, 10년 전 금화 상회의 빚 때문에 몰락한 북부의 한 백작가였다.
카이엘의 집안이었다.
카이엘은 그 소식을 듣고도 아무 표정이 없었다. 다만 그날 밤 연습장에 혼자 남아, 오래도록 목검을 휘둘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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